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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 모로(Aimé Morot)가 1895년에 그린 프레데릭 부쉐론의 초상화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프레데릭 부쉐론은 가업을 계승하는 대신 14세에 보석 세공술로 전향했습니다. 파리에서 쥘 셰즈(Jules Chaise)의 견습생이 되어 기술을 배운 후 팔레 루아얄(Palais Royal)의 틱시에 데샹(Tixier-Deschamps) 메종에서 점원을 거쳐 판매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두 사람은 당대의 뛰어난 주얼러였습니다.
1858년, 프레데릭 부쉐론은 매우 인기 있었던 팔레 루아얄의 부티크 중 한 곳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포목상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주얼리 코드를 새롭게 해석한 디자인을 선보였으며, 모든 주얼러들이 스톤에 집중하던 시대에 '착용 방식'에 중점을 두고 창작에 접근했습니다. 초기에는 다양한 예술 오브제와 주얼리 작품을 제작하며 고객에게 스타일에 관한 조언을 아낌없이 전해주었습니다. 주얼리를 케이스에 평평하게 담아 전시했던 경쟁사의 진열장과는 달리, 프레데릭 부쉐론은 주얼리를 세로로 전시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주얼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부쉐론은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며 문을 연 지 단 몇 년 만에 매장을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1866년, 프레데릭 부쉐론은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아뜰리에를 설립하고 최고의 주얼러 및 장인들과 함께했습니다. 이로써 부쉐론은 진정한 메종 부쉐론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리에르 퀘스천마크 네크리스, 1881년
프레데릭 부쉐론은 항상 주얼리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으며, 주변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작품을 고안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접했던 유연한 패브릭과 리본, 그를 매료시킨 자연의 서정적인 매력, 끊임없이 독창성과 현대성을 추구하는 여성 등 모든 것이 주얼리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락 크리스탈, 에나멜, 인그레이빙된 다이아몬드와 같이 잘 사용되지 않았던 소재나 오래된 기술들을 시류에 맞게 재해석했으며 골드와 목재, 마더 오브 펄, 에나멜, 하드 스톤의 색다른 조합을 과감하게 선보였습니다.
1879년, 그는 잠금장치가 없는 최초의 하이 주얼리 네크리스인 퀘스천마크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주얼리를 착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던 시대에 여성이 혼자서 착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네크리스였습니다. 프레데릭 부쉐론의 독창성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상을 포함하여 그에게 수많은 상을 안겨주었습니다.
1887년, 프레데릭 부쉐론은 왕관 다이아몬드(Diamants de la Couronne) 판매 기간 동안 특별한 스톤을 매입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는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시작되어 나폴레옹 3세까지 지속된 컬렉션으로, 프레데릭 부쉐론은 프랑스 정부가 주최한 판매의 주요 구매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스톤 수집가였던 마자랭(Mazarin) 추기경과 관련이 있는 "마자랭" 다이아몬드 2개를 포함하여 여러 개의 스톤을 구매했습니다.
부쉐론 아뜰리에, 1910~1930년경
프레데릭 부쉐론은 회사 운영에 있어서도 대담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노동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직공들을 소중히 여기며 이들을 해외에 파견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또한 유급 휴가 등 당대에는 보편적이지 않았던 혜택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일종의 사전 세미나 형식으로 파리 근교에서 매년 대규모 피크닉을 개최하여 일터에서의 친화성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만국박람회 기간 동안 스탠드에 장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등 장인의 존재를 강조한 최초의 주얼러이기도 합니다. 프레데릭 부쉐론은 이렇게 장인들이 만드는 주얼리만큼 장인들의 행복과 자부심도 소중히 여기는 가족 정신을 메종에 불어넣었습니다.
또한, 그는 주얼리 업계의 환경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보석상 조합(Chambre Syndicale de la Bijouterie)의 회장으로서 "상호부조회(La Fraternelle)"와 같은 여러 협회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의 활동과 기부금은 보석상 및 금세공인을 위한 은퇴 기금 조성, 은퇴자 주택 설립, 교육 자금 조달, 보육원 설립 등 다양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